뉴질랜드에서의 러닝 1940 년대 한때 럭비 선수 였으나, 그 무렵에는 뉴질랜드의 한
구두 공장 생산 라 인에서 일하던 과체중의 아서 리디아 드는 자기 인생에
어떤 변화를 주어야겠다고 결심하게되었다. 주말의 럭비만으로는 그의 허리
둘레에 붙은 스페어 타이어의 바람을 뺄 수 없었으므로, 그는 살을 빼기 위해
달리기를하기로 하였다.
하지만 그 시절 그 지역의 러너들을보고는 기가 꺾였다. 그들은 탈진 할
때까지 트랙을 뛰고 또 뛰었다. “고통 없이는 수확도 없다.”그 시절의 철학이었다.
아서는 몸매를 가꾸고 싶었다.하지만 그런 방법 말고, 그 대신에 그는 활짝 트
인 뉴질랜드의 길로 나섰고, 천천히 멀리 달리기 프로그램을 시작 하였다. 여러
달에 걸쳐 그의 체중은 줄어들었다.
여러 해에 걸쳐 그는 달리기에 중독되었고, 마 음속에 오래 숨어 있던 경쟁
심리를 발견해 냈다. 그는 마라톤을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게되었고, 곧
‘조깅하던 리디아 드’는 마라토너 리디아 드 ‘로 변신하게 되었다. 마침내 그는
1951 년 영연방 경기에서 뉴질랜드를 대표하게된다. 그 지역 젊은이들 몇몇이
리디아 드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고, 결국 그들의 코치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.
리디아 드는이를 받아들이고, 자기 학생들을 위해 천천히 멀리 뛰기에 중점을 둔
자기 고유의 달리기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 하였다.
1960 년 로마 올림픽에서 피터 스넬 (Peter Snell), 머레이 할 버그 (Murray Halberg)
와 배리 매기 (Barry Magee) 등 그 이웃의 세 젊은이들이 장거리 경 주 메달들을
차지했다. 리디아 드는 갈채받는 공인이자 국가 영웅으로 발돋움했다.
리디아 드가 조깅을 발명했다고도 할 수있다. 올림픽 후 그는 30 대, 40 대 또는
그 이후의 화이트 칼라 남녀들을 대상으로 연설 해 달라는 초청을 자주 받았다.
그와 이야기 해 본 사람들은 전에 과체중이 나가던 럭비 선수와 마찬가지로
자신들도 가볍게 뛰어 신체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으리라 느끼게되었다.
달리기는 몸무게를 줄일 수있을뿐 아니라 재미도있을 수있다.
리디아 드는 달리기의 일반적인이 미지를 강도 높고, 지루하고, 고통스러운
것으로부터 활기찬 뉴질랜드 라이프 스 타일의 사교적이고 개방 된 일부분으로
바꾸어 놓았다. 올림픽 메달의 신뢰성이 리디아 드로 하여금 수백만의 사람들에게
다 가설 수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. 1960 년대 초에 그는 그들을 의자에서
길로 끌어 내었고, 전위적인 달리기 운동이 시작되었다.